예전에는 고급 기술문서를 봐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를 활용하는 사람은 어느정도 수준이 있으므로 즐거운 대화나 논의를 할 수 있었고 기술적 공유에 나름 즐거움을 느꼈는데 말이다.

하지만 LLM 이후로 그 장벽이 크게 낮아졌다. 문서 전체를 긁어 넣고 “이 내용을 참조해서 구현해줘”라고 하면, 원래라면 이해하지 못해서 못 쓰던 자료도 AI를 중간에 끼워 어느 정도 흉내 낼 수 있다.

이러한 위험한 현상은 개인이 경계해야 할 이유는 명확하다. AI를 이용한 지식 도둑질의 장벽이 극단적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좋은 도구일 수 있지만, 남의 성과를 빼먹으려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도둑질 도구가 된다.

기업들이 외부 LLM 사용을 제한하고 내부망, 사내 인트라넷, 폐쇄형 저장소, 승인된 내부 도구만 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소스코드든 내부 문서든, 외부 서비스로 나가는 순간 통제권을 잃는다. 원천기술이 중요한 분야일수록 문서 하나, 코드 조각 하나도 함부로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생업에서 겪어온 지식 도둑질과 무임승차의 감각이, 이제는 쉬려고 붙잡고 있던 취미 영역까지 침범해버렸다. 롬해킹 강좌 하나를 쓰는 일조차 더 이상 심리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내가 남긴 기록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것이 누군가의 포장된 성과물로 둔갑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글화 관련된 롬해킹은 특수성을 가졌기 떄문에 자료가 극히 적고, 고급 지식이 개인의 시행착오에 크게 의존하는 분야에서는 이 변화가 더 치명적이다.

결국 이런 일이 반복되면 진짜로 아는 사람들은 입을 닫게 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비슷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들도 공개를 꺼리게 될 것이다. 이런 걱정까지 하며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상이 이상적으로만 돌아가면 문제가 없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수록 웹에 남는 것은 검증된 고급 자료가 아니라 저품질 쓰레기뿐일 것이다. 최근 해외 롬해킹 사이트들에서 AI 사용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여러 규정을 신설하는 것도, 결국 포럼 내 저품질화를 막기 위한 조치다.

지식 공유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 공개 비용이 너무나 커져버렸다. AI를 통해 재포장되어서 기본 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가 한 것 마냥 전문가 행세를 하는 세상이 와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급 강좌를 쓰는 일은 더 이상 단순한 호의가 아니다. 내 시간과 경험과 판단을 어디까지 공개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종의 보안 문제가 되어버렸다.